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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로그인] 코로나19 ‘뉴스 감염’도 조심

'필수업종’인 뉴스를 생산하는 사람이 있으면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도 있다. 코로나19가 얼마나 확산됐는지, 사망자와 감염자가 얼마나 늘었는지,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주의해야 하는지, 이어지는 뉴스를 쉼없이 온라인에 전달하다 보니 몸은 고립되고 관심은 온통 코로나뉴스다. 뜻밖에 만만찮은 스트레스다. 다행(?)히도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어서 웹에는 코로나 상황의 정신 건강을 경고하는 심리학자들의 조언이 속속 올려진다. 몇 가지를 골라 실천해보았다. ▷아침과 저녁을 감사일기로 시작하고 마무리하기 ‘감사일기’ 는 감사할 일 열 가지를 노트에 적는 것이다. 감사일기를 쓰게 되면 MRI로도 확인될 만큼의 뚜렷한 뇌 활동 변화가 일어나며 스트레스 관리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오늘 아침에는 건강하게 잠에서 깨어난 것을 감사하고 편히 숨 쉴 공간이 있음을 감사하고, 깨끗한 물 한잔을 걱정 없이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하고 가족 모두 함께 새 아침을 맞이함에 감사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아마도 오늘 할 일을 열심히 해낸 것에, 친구와 메신저로 안부를 나눌 수 있었음에, 비 갠 베란다에서 늦은 오후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휴식할 수 있는 행운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작고 사소한 구석에 숨은 감사가 많았다. ▷자가격리나 재택 근무를 휴가로 착각하지 않기 평소 생활 리듬을 절대 유지해야 불안과 우울을 막을 수 있다는 조언을 새겼다. 예전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씻고 식사하고 일하던 시간에 무조건 책상 앞에 앉았다. 침대에서 밥을 먹거나 아무 때나 TV를 켜면서 느슨한 휴가로 착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멀리있는 가족과 영상 채팅하기, 정해진 시간에 집안 소독하기 식으로 스케줄을 정해서 실천하는 것이 좋다. 인생을 조직하고 구조화하면 일어날 일에 기대감이 생긴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새겼다. 쉬운 실천법은 일어나자마자 오늘 할 일 리스트는 만드는 것이다. 계획이 생기고 할 일이 생기고 성취감이 생긴다. 아침마다 리스트를 만드는 행동 자체가 오늘 할 일의 한 가지를 이미 수행한 셈이 되기도 한다. ▷가능한 ‘외출과 운동’ 방법을 찾아두기 감염 위험으로 마켓도 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는 상황이다. 일을 나가야 하는 사람에게나 먹거리를 마련해야 하는 대부분의 우리에게는 실천 불가한 명령이지만 바깥 바람을 쐬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생존에 필수다. 집 근처 조용한 주택가를 찾아 마스크를 쓰고 빠른 걸음으로 산책했다. 점심 후에는 베란다 캠핑 의자에 앉아 유튜브 숲 속 사운드 영상을 찾아 들으며 요세미티에서 캠핑하는 착각 시간도 가졌다. 홈 트레이닝 영상도 많지만 아랫집 천장 울릴까봐 뛰기는 부담스러웠다. 어릴 적 배운 국민체조를 세 번 연속하는 영상을 따라했다. 예전엔 하나마나 싶던 단순한 동작인데 뜻밖에 상당한 스트레칭과 리프레시 효과가 있었다. 코로나19로 육체적으로는 제각각 고립되어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전 국민과 동질의 유대감으로 연결되었다는 어느 전문가의 조언이 가슴에 와 닿는다. 코로나에 걸렸을까 걱정, 나와 가족들을 어떻게 보호할까 걱정, 온 도시가 문을 닫았는데 무슨 돈으로 어떻게 먹고살까 걱정은 나만 하는 게 아니며 결국 이 시간은 지나간다는 말이다. 이 시간, 뉴스 뷰가 치솟는 것은 운영자로서는 감사할 일이지만 코로나뉴스 '감염' 을 막으려면 정해둔 시간만큼만 보시라 전하는 이 마음의 모순만큼은 오늘의 걱정이 아닌 감사에 넣기로 한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20-04-08

[감성 로그인]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는 착각

한때 댓글을 많이 썼다. 초창기 블로그 서비스 시절이니 십수년 전이다. 유명 포털에 블로그를 개설하고 신기한 마음에 열심히 글을 쓰고, 찾아온 다른 블로거와 의견을 주고 받고 답방하고 그러다가 일상의 소소한 얘기도 나누는 친구가 되곤 했다. 동등한 블로거끼리의 교류인 만큼 나누는 댓글은 정중했다. 아이디로 등장하지만 체감 온도는 실명과 똑같았다. 얼굴 없이 문자로 교류하다 보니 오히려 어투, 사용하는 어휘가 내 캐릭터와 인격을 결정했다. 오해도 쉬웠다. 실제 대화보다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뉴스 댓글도 쓰기 쉽지 않았다. 포털 같은 큰 사이트에서 익명의 아이디라 해도 내 의견을 온 천하에 내놓는 건 조심스러웠다. 누구도 나라는 걸 모르지만 아무도 모르는 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월드와이드웹(WWW)의 초현실적인 글로벌 인터넷망이 머리 속에 마구 그려지면서 지구촌의 수천만 한글 사용자들에게 내 한마디가 전달된다는 상상만으로 충분히 위압됐다. 쓸 때 그랬지만 읽는 댓글도 무게를 실어 읽고 마음에 담았다. 한마디 짧은 말도 내내 지워지지 않았고 그것이 무한한 기쁨을 때로는 아픔을 주었다. 인터넷이 상용화되고 게시판이건 블로그건 메신저건 수다 떨듯 댓글 한마디 안 써본 사람 없는 요즘이 됐다. 이제 댓글은 개개인의 독립된 생각을 내놓는 공간이 아니라, 좌파 우파, 진보 보수, 여당 야당, 친 트럼프 반 트럼프 같은 이른바 자신의 지지 성향이나 집단이 정한 ‘프레임’의 논리를 매뉴얼 읊듯 반복 게시하는 대자보로 전락한 인상이다. 뉴스에서 어떤 토픽을 어떤 시각으로 다루었는지, 뉴스가 다루고 있는 팩트가 무엇인지는 노관심. 제목만 읽고, 후루룩 훑어내리다가 꽂힌 한마디 단어만 취하고 여기에 똑같은 프레임 댓글을 줄줄이 달아붙이는 행태가 유행처럼 흔하다. 대부분이 극단적인 찬양 아니면 무자비한 공격이다. 한글 사용자들이지만 한국 내 사이트와는 유저층이 다른 미주중앙일보 웹사이트의 뉴스 댓글도 현상은 마찬가지다. 사이트 유저의 70% 이상이 25~54세, 액티브한 연령대는 35~44세 사용자다. 사회적 이슈의 경중을 가릴 수 있고, 뉴스의 가치판단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뉴스 댓글의 중요성과 파장을 잘 아는 사용자들이다. 댓글을 한번 쓰려면 회원 인증을 받아 가입하고 로그인을 해야 한다. 그런 절차를 거치고 시간 들여 입장한 뉴스 페이지 댓글에 건설적인 비판보다 욕설이 난무하는 건 매우 안타깝다.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는 자조 섞인 선언이 유행인 때도 있었다. 욕을 하고 비아냥대고 보이지 않는 삿대질을 거리낌없이 해대는 악플이라도 관심이 있으니 가능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하지만 총체적 난독증이 유행병처럼 흔한 이 시절에는 그마저 지나간 착각이다. 뉴스를 읽고 포인트를 이해하고 ‘악플’을 달았다기엔 동문서답도 프로급이다. 무엇보다 악플은 비판적인 댓글을 칭하는 말이 아니다. 칭찬하는 댓글은 선플이고 야단치는 댓글은 악플인 게 아니다. 비판적인 댓글은 오히려 선플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찬양 일색인 댓글은 차라리 독이 되는 악플일 수도 있다. 묻지마 욕설에 다짜고짜 비아냥인 댓글을 쓰며 개인의 분노는 해소될지 모르지만, 그런 용도로 쓰기에 기사 한줄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이, 그 기사를 웹에 올리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노고와 비용이 너무나 아깝다. 사회적 리소스의 낭비다. 이제 좀 그만 쓰자 악플, 그리고 많이 쓰자 댓글.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20-03-06

[감성 로그인] 코로나 바이러스, 헛소문 바이러스

매우 어질어질한 ‘음력 새해’를 맞고 있다. 미국살이에 한국 명절이란 형편 되면 슬쩍 기분쯤이나 내고 시간도 여유도 없으면 어물쩍 넘기는 애매한 날인데 올해는 중국발 우한 폐렴이 글로벌 공포로 본격 확산된 불운의 음력 설이 됐다. 현재까지 중국에서 16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4500명이 확진자로 집계됐으며 미국에서도 다섯명의 감염자, 특히 LA와 OC에서 두명의 확진자가 나오면서 한인들의 염려와 관심도 점점 증폭되고 있다. 위력적인 뉴스의 등장 다음 순서는 사람들간의 전파와 확산이다. 특히 진입 장벽 없고 차별없는 온라인의 겁없는 전파력은 때를 놓치지 않고 광속의 위력을 발휘한다. 며칠 새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공기관의 정보보다 전염병 공포를 자극하는 미확인 부유 물체, 가짜 뉴스들이 소셜네트워크와 메신저의 강력한 ‘신종 바이러스’로 등장했다. 감염자가 노상에서 쓰러진 현장 사진이다, 병에 걸린 것이 억울해 악의적으로 퍼뜨리러 돌아다니는 환자가 있다, 어느 쇼핑몰 어느 식당에 감염자가 드나들었다더라 같은 확인 불가한 소문 바이러스들이 소셜네트워크와 메신저를 타고 공포와 불신을 전염시키고 있다. 지난 21일 페이스북에는 미국이 몇 년 전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 특허를 받았다는 음모론이 크게 주목을 끌었다. 오레가노 오일이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제라는 허위 주장도 최소 2000번 공유됐다. 트위터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해시태그가 인기 트렌드로 부상해 각양각색 개인의 주장과 패러디 밈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영상이 쏟아지고 있는 유튜브는 거짓 정보의 확산을 막기 위해 신뢰성 있는 소스를 우선 노출하는 알고리듬 가동에 진땀을 빼고 있다. 구글에서는 한때 ‘코로나 맥주 바이러스’의 검색어가 트렌드에 올랐고 코로나 맥주로 바이러스를 치료한다는 황당한 댓글까지 화제가 됐다. 중국서 사용할 수 없는 틱톡에 우한 시 거리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중국 환자 영상이 올려지거나 중국 정부가 인구 통제를 위해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영상이 보고되는 등 적법성이나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영상들이 빠르게 공유되고 있어 문제다. ‘인간은 뒷담화로 지구를 정복했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이 설마 현 인류에게 가장 큰 선물이랄 ‘인터넷’을 흉흉한 입소문과 터무니없는 뒷담화에 저렴하게 사용해도 당연하다는 말은 아닐텐데, 시대적 대략난감이 몹시 안타깝다. 운전대를 잡고 복잡한 도로를 달리는 머리 속에는 늘 한가지 생각이다. 다들 자기 목숨 귀한 줄 알고 잘들 하겠지… . 생명있는 모든 개체의 숙명인 ‘생존본능’ 덕분에 각자 자기 줄, 자기 자리 유지하며 달리고 멈춘다는 사실을, 그것이 이 시간 안전 운행의 실질적인 이유며 누구나 자기 목숨 지키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암묵적 믿음을 생각하면 혼잡스러운 도로 위의 질서정연한 불빛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마찬가지다. 이 황망한 전염병에 감염된 사람들이나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나 누구라도 걸리고 싶어 걸리는 사람 없고 내 목숨 무사히 제대로 지키려는 본능은 똑같으니 누구를 탓할 것도 지적할 것도, 터무니없는 미혹도 부질없다는 얘기다. 다양한 시각의 담론과 상하좌우 제약없는 치열한 논쟁, 그리고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하는 데 최적의 공간인 온라인은 특히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절제되고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헛소문 바이러스는 우리 누구에게나 꺼내어 쓸 수 있는 백신이 있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20-01-29

[감성 로그인] ‘오케이 부머’와 ‘라떼는 말이야’

하필 왜 나이를 ‘먹는다’고 할까. 떡국 한사발에 자동으로 한 살 먹듯이 세월따라 쉽게 쉽게 한 살 더한 ‘어른’ 이 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했던 시절에 그랬다. 나이 먹었다고 다 어른은 아니더라는 실망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좋아! 난 넙죽넙죽 세월이 주는 대로 나이 먹지 않고 차곡차곡 스스로 쌓아 제대로 ‘나이 들겠어’ 다짐했던 시절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오늘의 나는 부인할 수 없이 세월 따라 나이 먹는 자동 어른이 되어 있다. 매해 새로 맞는 이 나이는 나에게도 처음이라, 어떤 게 잘 나이 드는 것인지 경험 없는 채로 하루하루 허겁지겁 살아내며 나이를 ‘먹고’ 세대 구분이 확연한 어른의 자리에 이르러 또 한 해를 마감하려 한다. 최근 화제와 논란이 있었던 '오케이, 부머'는 그래서 더욱 남의 얘기 같지 않았다. '아 됐어요, 어른신들'쯤의 뉘앙스가 될 이 짧은 한 마디의 유행은 강렬했다. 전 세대의 경험을 오늘의 기준으로 쓰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도 그 경험을 지렛대가 아닌 권위와 무기로 쓰려 드는 ‘베이비 부머’(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들에게 젊은 세대들이 내건 바리케이드다. 세상의 변화와 흐름에 발맞추거나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 질서만을 반복 강요하는 ‘꼰대’들에게 기대를 접었다는 단절의 선언이기도 하다. ‘오케이 부머’가 미국 기성세대의 뒷골을 강타한 세대 단절의 상징어라면 ‘라떼는 말이야’ 혹은 ‘Latte is horse’는 올해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를 휘저은 또 다른 세대 갈등의 언어다. ‘라떼는 말이야’는 ‘나 때는 말이야…’를 코믹하게 변주한 어구다. 철자가 달라도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절묘하게 교체 사용하는 젊은 세대들의 유행에 따라, 기성세대들이 흔히 아래 세대의 잘못을 지적하고 훈계할 때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뻔한 자기 자랑을 ‘라떼는 말이야’라고 함축하여 지칭하고 슬쩍 비꼬는 것이다. 본인들 입장에서는 경험담과 조언, 듣는 어린 세대들 입장에서는 따분한 자기 자랑과 훈계로 이름지어지는 ‘꼰대스러움’의 전형적인 대화법을 풍자하는 ‘라떼는 말이야’는 한발 더 나아가 영어로 ‘Latte is horse’로 유머러스하게 사용되며 온라인에 각종 패러디와 밈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같은 제목의 노래에서는 ‘너네는 처음부터 잘했냐, 제발 나 좀 내버려둬’라는 절규가, ‘라떼 장인이 되지 않는 법’같은 반어적인 경고글들이 쏟아졌다. 나 역시도 후배나 자녀 세대들의 말과 행동에 물음표가 생길 때 나름 이해하려 한답시고 그 나이 때 나는 이랬던 것 같아, 나는 그 시절에 이런 생각을 했었어, 를 남발했음을 고백하며 되뇌인다. 결국은 그런 것이다, 나이를 잘 먹어야 하는 것이다, 나이 잘 들어서 좋은 어른이 현명한 리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연말에는, 연초에는 이제 그런 생각을 다지며 겸허한 시간을 꾸려야 하는 것이다. 호주의 원주민 오스틀로이드는 그들 스스로를 ‘참사람 부족’이라 하고 문명인을 가리켜 ‘무탄트’라고 부른다. 유명한 무탄트 메시지의 한 구절이 오늘 더욱 뼈를 때린다. “나이를 먹는 것은 누구나 노력 없이 벌어지는 일인데 왜 생일 축하를 하는가? 자신이 작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는 스스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언제 파티를 열어야 할 지는 자신만이 말할 수 있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9-12-24

[감성 로그인] 알고리즘 권력의 시대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나를 이끌었다." 요즘 유튜브에서 유행인 댓글이다. 수십만 조회수를 기록한 인기 영상에는 어김없이 이런 댓글이 올려진다. 왜 보게 되었는지, 어쩌다 보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내 취향에 맞는 영상이 눈앞에 나타났고 관심을 끌었고 만족했고 이렇게 댓글까지 쓰고 있다- 는 어떨떨한 고백이다. 여기에 다른 방문자들도 나도 그렇게 들어왔다, 어찌어찌 이 영상을 보게됐다, 신기하다 독심술 쓰냐, 놀라운 알고리즘의 능력이라며 동감한다. 간혹 드물게 '생각까지 감시당하는 것 같아 소름끼친다'며 경각심을 일깨우는 사용자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좋아하는 셀럽의 영상을 하염없이 볼 수 있어 즐겁다거나 내 생각과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좋았다거나 궁금했던 정보인데 알아서 찾아주니 편리하다고 여긴다. 한때는 웹 전문용어였지만 이제는 보통명사쯤으로 익숙해진 '알고리즘'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해놓은 절차를 말한다. 웹에서는 소셜 미디어나 뉴스 영상 포털사이트 같은 서비스에서 사용자에게 노출되는 정보의 선택과 배치, 노출 빈도와 서열을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동화시키는 규칙으로 알려지면서 일반에게도 익숙한 개념이 됐다. 문제는 사용자 개개인의 수요에 맞춰 알고리즘을 적용하고 '서비스'하려면 사용자를 '알아야' 하므로 개인 정보와 관심사를 여러 방법으로 수집하고 데이터화하게 되는데 그 데이터를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하는 알고리즘에 적용시킨다는 점에 있다. 아니 애당초 알고리즘의 목표는 서비스가 아니라 수익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 문제다. 디지털과 웹 데이터의 시대에 가장 경계해야 할 새로운 권력은 '알고리즘 권력'이다. 개개인의 웹서핑에서 알고리즘 권력이 드러내는 모습은 모두에게 익숙하다. 내가 보고 있는 웹페이지에 슬쩍 '비슷한 관심사'를 보여준다. 이름도 근사한 '큐레이션 서비스'라고 소개하며 당신을 위한 맞춤 서비스를 무상 제공한다고 유혹한다. 당신이 틀림없이 좋아할 것 같으니 확인해보라고 한다. 당신을 위한 특별 할인이나 추천이 있다고 한다. 당신의 행동을 보니 분명 이게 필요할 것 같다고 이끈다. 당신의 친구들은 이걸 많이 봤다(좋아했다)고 귀띔한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있어 한 기사(상품, 정보, 영상, 사진)였는데 당신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부추긴다. 여기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그 다음에 이렇게 했다고 유도한다. 유튜브에서 페이스북에서 넷플릭스에서 스포티파이에서, 알고리즘 덕분에 나는 나도 미처 몰랐던 내 관심사와 취향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깨닫는 역설이 벌어지는 요즘이다. 알고리즘의 능력은 내가 지닌 생각과 가치관을 강화할 뿐 아니라 일정한 방향으로 교묘하고 은근하게 유도하고 편입시키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권력이다.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넙죽 받기만 할 때가 아니다. 절대적으로 공정할 것만 같은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은 하지만 설계자의 가치관과 목적에 따라 얼마든지 편향되고 휘둘릴 수 있다. 보여지고 주어지는 정보만 취하지 말고 필요한 정보를 검색해서 찾는 디지털 습관이 최종 방어책이다. 물론 검색 결과에서도 개인의 '의견' 이 아닌 신뢰할 '정보' 여부를 검증하고 취하는 것은 디지털과 알고리즘 권력의 시대를 사는 시민의 덕목이 됐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9-11-20

[감성 로그인] 온라인 응답자 741명의 의미

신문사 디지털부에서 일한다고 하면 웹이나 IT에 꽤 능한 사람으로 '오해' 받는 일이 생긴다. 인터넷이나 웹이나 IT나 심지어 컴퓨터(라는 하드웨어)의 문제점을 막 물어오면 대략,을 넘어 매우 몹시 난감해진다. 인터넷, 웹사이트, 모바일, 디지털 미디어 같은 엄청나게 포괄적인데 지나치게 간략한 단어로 압축 명명되는 이 분야에는 새털처럼 많은 업무가 세분화 돼있고, 다수의 인력이 그 '새털'을 직조하듯 얽혀 처리하는 일에는 사실상 '인문학적'인 부분이 많다. 보이그룹 걸그룹에서 먹방 담당이나 비글미 담당을 내세우듯 나는 이쪽에선 '인문학적 소양'과 '사용자 눈높이' 담당이다. 사용자들의 경험을 딱 반걸음 먼저 체험하고 그 눈높이에 공감하려면 기술적 숙련은 외려 독이 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터억 내걸고 사용자 수준의 웹 상식을 '유지'하는데 힘쓰는 기획자 운영자다. 하고 싶은 말은, 이처럼 웹사이트를 만들고 운영한다는 것은 테크놀로지 친화적이면서 트렌드를 주도하면서 최신 첨단 날카로운 이성의 폭발 뭐 그런쪽 보다는 외려 대단히 노동집약적이고 감성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외계어 수준의 프로그래밍 언어가 좌악 깔린 모니터에 손가락 휘날리는 키보드 '마우스질'의 포스 이면에는 화살표 하나 점 하나, 깨알 버튼과 가로 줄 하나에 올인하는 기획자와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와 운영자의 가열찬 감성 노동이 엎드려 있다. 간단한 클릭 하나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화면 한 페이지에 어떤 고독한 코딩의 지난한 인내가 담겼는지는 며느리도 누구도 모른다. 최근 코리아데일리닷컴이 온라인 독자 설문조사를 진행한 것도 이런 이유다. 보이지 않는 독자들의 모니터 속으로 수없이 날린 종이비행기를 잘 받았는지, 어떻게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고 싶었다. 온라인 설문이니 일일이 찾아가는 대신 '쿨하게' 온라인으로 묻고 온라인으로 답해달라고 했다. 메인홈에 한 줄, 여러분이 누구신지 궁금합니다 알려주세요, 적어 올렸다. 그 한마디를 누르고 들어와 고민하고 답하고, 길고 친절한 마음을 나누고 떠난 741명의 독자가 있다. 코리아데일리닷컴의 주간 방문자수에 대비하면 0.1%에 불과한 숫자다. 하지만 하나의 응답은 백배 천배의 가치와 무게가 있다. 특히 모니터 속 독자와 만나는 '새털' 작업자들에게는 수십만의 가치를 넘는다. 사이트가 깔끔하고 구성이 좋다는 노트에 디자이너의 수개월 노심초사가 물감처럼 풀어졌다. 최신 뉴스 업데이트가 타 사이트보다 빠르다는 반응에 진종일 뉴스를 올리고 내리는 깨알 노동의 소통을 맛본다. 댓글을 달 수 있어 좋다는 인사에 스팸 욕설 댓글로 상처난 가슴이 아물고, 콘텐트가 다양해 타 사이트 비해 유익하다는 평가로 커뮤니티 서비스의 이름없는 '운영자'들은 땀을 식혔다. 로딩이 빠르다는 사용자의 한순간 경험담에 방문자 끊긴 심야를 기다려 홀로 서버를 점검하는 프로그래머의 고단이 잠을 이룬다. 더하여, 이런 설문조사를 통해 독자에게 초점을 맞추려는 노력이 코리아데일리닷컴의 장점이라는 너그러운 한마디가 사무치게 감사하다. 칭찬에 기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알아채기 힘든, 안보이는 시간의 노력이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믿음이 있고 결국 알아보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이, 독자와 그렇게 소통이 이뤄진다는 기쁨이 감사하다는 그런, 말이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9-09-25

[감성 로그인] 윈스턴 홀세일몰의 '인종 풍경'

윈스턴 홀세일몰의 북쪽 입구에는 이라니안 부부의 잡화점이 있다. 콧수염 두둑한 아르메니안이나 히잡 쓴 여인들이 지나치다 몰 안으로 들어서는 시작점이다. 옆 잡화점에서는 말솜씨 좋고 인심 후한 한인 여주인에 바지런한 히스패닉 헬퍼가 온 동네 손님들을 자석처럼 끌어모은다. 긴 통로 중앙에는 춤추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우스꽝스러운 버블 헤드를 파는 대만 부부의 취미용품점이 흑인 커스토머들을 단골로 두고 있다. 가톨릭 성모상에 종류도 다양한 천사 조각상이 매일 한두개씩 깨져 나가도 그러려니 하는 장식품점의 주 고객은 히스패닉이다. 본토 중국 출신의 여주인은 앞집 대만 부부와 북경어인지 민난어인지 모를 그들만의 언어를 주고받고 도시락을 나누며 자매처럼 지낸다. 남쪽 입구에서 쇼케이스 하나 놓고 체인월렛과 라이터를 파는 젊은 남자는 히스패닉이다. 멕시코 깃발 펄럭이는 출입문 앞에서 하루 종일 라틴 채널 라디오를 틀어놓고 사람 좋은 미소를 날리며 지나는 행인들을 쇼핑몰로 이끈다. 몰 바깥 스트리트 파킹 미터기 앞의 깡마른 흑인 남자는 미터기 시간이 다 되면 쿼터를 넣어 시간을 벌어준다. 뒤늦게 허둥대며 달려온 히스패닉 손님이 그라시아스를 연발하며 팁을 건넨다. 가장 큰 잡화점의 한국인 주인은 쇼핑몰의 읍장이다. 이라니안이건 차이니즈건 멕시칸이건, 가게 주인이건 손님이건 헬퍼건 대동단결 하소연하고 의논하고 울고 웃으며 그를 찾는다. 매일 드나드는 세일즈맨은 코리안, 차이니즈, 인디안, 멕시칸, 살바도리안에 말레이시안까지 제각각의 ‘장기’ 가 있다. 덕분에 한국서 들여온 고급 액세서리에 다양한 인도 가죽용품에 중국 현지 공장과의 잡화 직거래가 저렴하게 펼쳐진다. 한낮에는 소시지 김밥을 찾는 히스패닉과 도넛에 한국 믹스 커피를 주문하는 흑인과 사발면 뚜껑에 나무 젓가락을 올려둔 차이니즈가 좁은 스낵숍 안을 요령껏 오가며 행복한 점심을 즐긴다. 4.29 폭동 때 코리아타운에서의 무용담을 수년 째 반복하는 스낵숍 사장과 그 얘기에 서슴없이 엄지를 치켜드는 흑인 손님도 그곳에 있다. 다운타운 토이 디스트릭트의 작은 홀세일 몰 안에서 그들은 다같이 그렇게 ‘덕분에’ 살아간다. 그가 있어 멀리 브라질에서 현금 다발 두둑한 빅 커스토머가 찾아오고 그가 있어 아르메니안 소매상이 부담없이 가게에 발을 들이며 그가 있어 흑인 잡화상이 집집마다 기웃대며 흥정을 한다. 그가 있어 예수 조각상과 함께 생뚱맞은 지갑 한 다즌이 팔리고 액세서리 단골이 어느날 문득 백팩을 라이터를 팔아보자고 옆가게에 들어선다. 몰 안에 어느 조각 하나도 빠지면 안될 퍼즐같은 공생의 현장이다. 인종을 녹여낸 용광로까지 바랄 필요도 없다. 샐러드로 비빔밥으로 어우러지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만들어지고 존재 이유가 생겨난다. 서로의 차이에서 서로의 소중함을 배우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나는 미국의 맨 얼굴을 보았고 미국 사회의 귀한 정신을 배웠다. '히스패닉의 침공' - 지난 주말 엘파소에서 총기 난사로 40여명의 사상자를 낸 백인 총격범이 온라인 게시판에 남긴 선언문은 히스패닉이 텍사스를 장악할 것을 염려하였노라고, 이를 저지하고자 분연히 총격을 가했노라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은 진정 모르는 것인가.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시작과 성장의 과정을, 누구의 손에도 주인의 채찍 따윈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니 외면하는 것일까.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다함께' 이 사회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그 엄연한 진실을 말이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9-08-07

[감성 로그인] 당신의 독립기념일은?

리처드 포드의 소설 '독립기념일'에서 마흔넷의 이혼남 프랭크는 전처와 사는 사춘기 아들과 독립기념일 휴가 여행을 떠난다. 프랭크는 아들에게 자유와 독립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여행을 계획했지만 실제 그가 겪는 독립기념일은 불의의 사건사고로 얼룩진 축제의 날, 독립을 갈망하는 사춘기 아들의 혼란과 대면하는 고통의 휴일로 찾아온다. 온 국민이 떠들썩 기뻐하며 폭죽을 터뜨리고 즐기는 최강대국 미국의 탄생일이라는 화려한 배경 앞에서 평범한 소시민들이 치르는 '솔직한 국경일'은 어쩌면 그렇게도 외롭고 지독히 개인적이다. 국경일을 개인의 일상에 온전히 내면화·동기화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특히 성인이 되어 미국에 온 한국인들은 '허겁지겁' 충돌하듯이 미국의 명절과 기념일 문화에 접속된다. 뉴이어스데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은 그럭저럭 낯익어도, 달마다 기념일은 왜 기념하는지도 모르는 채 남들 따라 놀고먹으며 흘려 보낸다. 나도 그랬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축하해야 한다기에 그런가 보다, 조지 워싱턴 생일날이 대통령의 날이라기에, 메모리얼데이는 현충일 같은 날이라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고 찾아온 독립기념일은 그럼 광복절 같은 날인가 했는데 달랐다. 광복절은 태극기 조신하게 내걸고 장중한 기념식 중계를 온 국민이 관전하고 독립투사께 묵념하듯 보내는 내면의 휴일이었는데,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무장해제한 한마당 축제였다.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다시 태어난 생일날이 너무나 기뻐 폭죽을 터뜨리고 왁자지껄 바비큐 파티를 열며 개인주의자 미국인들이 모처럼의 단합과 결속을 이루는 명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숯불 매운 연기 속에 바비큐를 줄창 구워도, 아낌없이 팡팡 터지는 불꽃 폭죽에 감탄하며 셔터를 눌러대도 여전히 '독립의 기념'이 뼈저리게 사무치게 와닿지 않는 서글픈 간극은 어쩔 수 없다. 그럴 때 생각했다. 미국 땅으로 옮겨 오며 한국의 삶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탓이라고.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고 독립을 애써 구하지 않았고 어쩌면 독립을 바라지도 않았던 때문일 거라고. 개인의 삶에서 독립을 기념할 수 있는 날, '7월4일'처럼 명확히 점찍는 날이 가능할까. 모태와 분리되며 독립의 테이프를 끊었달 수 있다. 걷기의 시작이 '자립'의 독립에 첫 발일 수도 있다.부모의 조력 없이 이뤄낸 어떤 작은 성취가 독립 역사의 첫 줄일 수 있고, 주민등록증이 공인한 성인의 날, 첫 월급으로 경제적 독립을 현실화한 날, 결혼하여 심신을 온전히 독립된 가정으로 옮겨놓은 날이면 독립 기념일이 될까. 아니, 한국의 삶을 마감하고 미국에 첫 발을 딛은 그날이 나의 독립기념일이 되어야 하는 걸까. 무엇을 떠올려도 여전히 몸은 어딘가에 붙잡혀 있고 마음은 무엇엔가 의지해 있다. 홀로 서있지 않다. 어떤 존재의 온전한 독립이란 선언만으로, 갈망만으로, 경제적 자립이나 공간의 분리만으로 완료되지 않는 무한에 수렴하는 알파요 오메가인가 싶다. 게다가 요즘엔 한가지 독립의 과제가 추가됐다. 울타리로 조력자로 자식의 부모로 살아가는 동시에 자식의 삶에 매몰된 부모의 삶, 자식 인생에 경도된 부모 삶의 목표, 자식의 삶에 투사된 부모의 성취 같은 '의존적인' 부모의 삶에서 독립을 선언할 때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올해도 나의 온전한 독립기념일은 미완이다. 당신의 독립기념일은 어떤가, 결정되어 있는가.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9-07-03

[감성 로그인] "찾으면 다 나와, 잊어도 돼"

지난 마더스데이에 선물을 고르려고 인터넷 쇼핑몰을 몇 군데 돌아다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둘러보다 브라우저를 닫았다. 며칠 지나 노트북을 열었는데, 페이지 오른쪽에서 내가 그날 구경했던 바로 그 신발이, 그 가방이 광고 배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화면 아래쪽에선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화장품이, 영양제가 줄줄이 흘러간다. 나는 네가 지난번에 뭘 보고 혹했는지 다 알고 있다면서 찜을 했던 물건을 콕 찍어 줄 세운다. 이거 마음에 있잖느냐고, 잘해줄 테니 어서 와 클릭하라고 팔을 잡아끈다. 가물거리는 기억이 가물거린다는 사실을 채 깨닫기도 전에 빠릿빠릿한 인공지능 로봇이 내가 접속한 순간 바로 들이닥쳐 느슨해져 가는 기억의 회로를 부지직 이어주는 경험이 점점 잦아진다. 그 경험을 역으로, 가성비 좋네 하며 지나쳤던 자동차용 청소기 모델을 남편에게 알려주려다가 기억이 안 나 브라우저를 열면 어김없이 광고 상품으로 변신 등장해주니 어김없이 확인할 수 있다. 내 서핑 히스토리를 고스란히 빼가는 AI를 약삭빠르게 써먹었다는 쾌감에 잠시 우쭐도 하지만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단맛에 중독된 무기력한 내 미래가 염려되기도 한다. 이미 나는 기억력의 일부를 스마트폰에 내어주고 '외장하드'로 곁에 두고 사는 자발적 종속자다. 식구 친지들의 전화번호·생일·기념일·주소 다 적힌 오래 묵은 수첩, 처리할 일과 약속 촘촘히 정리한 스케줄 노트, 나중에 써먹자고 그때 그때 적어둔 메모장은 물론 예전에 배운 것, 요즘 새로 익힌 것 되살릴 필요가 있을 때 냉큼 서치해서,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는 정보인 양 행세하게 해주는 엽렵한 백과사전이 그 안에 다 들었다. 흘려들어도, 스치고 지나쳐도 안심이다. 정확히 어딘지 모르지만 그 어딘가에 다 들어 있어 괜찮다. '돌아서면 잊어먹는다'는 인생 선배들의 한결같은 푸념이 내 고백이 될 줄 미처 몰랐던 몇 해 전만 해도 나는 스마트폰이나 인공지능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불끈 다짐했다. 하지만 냉장고에서 뭘 꺼내려고 했는지, 이층 계단은 왜 오르기 시작했는지, 집 나서는 남편을 왜 불러세웠는지 뇌 회로가 십 초씩 깜빡 깜빡 점멸등을 켜는 요즈음이 됐다. 더구나 한창 이야기 중에 누구의 이름이나 사건 발생일이나 오간 돈의 액수나 가격 뭐 그런 키포인트가 죄다 그 왜 있잖아 그 사람, 90년댄가 2000년댄가 그 무렵에, 아마 삼백불이었나 오백불이었나 아무튼…으로 흐리멍덩 뭉뚱그려질 때의 당혹감은 자괴와 자책으로 스스로를 갉기 일쑤다. 그럴 때 스마트폰을 열어 '검색' 의 능력을 빌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잠시만 몰랐던 것으로, 잠깐 기억이 안 나는 것으로 심상히 넘어갈 수 있으니 진정 행복하다. 안개처럼 갑갑한 엉킨 기억의 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더없이 감사하다. 적당히 잊고, 적당히 흘러가는 기억 떠나보내고, 적당히 인공지능과 스마트한 전화기의 능력에 기대며 살아가는 좋은 시절을 그냥 누려보기로 한다. 좀 잊으면 어때, 찾으면 다 나오는데,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는데.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9-05-21

[감성 로그인] '한인뉴스' 폭풍 클릭, 그 이유

한인 의사 등 4000만불 뇌물 유죄 / 날치기 강도 한인마켓 손님 노린다 / 손주 돌보러 미국 온 60대 한인 추방 / ICE 한인 기업 급습 무더기 체포 / 돌아온 원정출산아 미국서 특혜만 누린다…. 최근 일주일간 미주중앙일보 웹사이트 코리아데일리닷컴(koreadaily.com)에서 하루 최고 클릭 수를 기록한 기사들이다. 코리아데일리닷컴 홈에서는 신문 지면으로 발행되는 뉴스와 함께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한국발 통신 뉴스와 한국 중앙일보 기사들도 선별 소개되기 때문에 뉴스 영역에서만 하루 최소 150여건 이상의 기사들이 노출된다. 사이트 방문자들은 미주중앙일보의 현지 취재 기사와 함께 한국과 세계 각국에서 발생한 각양각색의 뉴스들을 나란히 한자리에서 접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내 정치권의 굵직한 뉴스와 연일 터지는 총격 테러 소식, 미 대륙 전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사고, 한국의 주요 정치 사회 현안과 연예계 성폭력 가십들까지 눈길과 관심을 끄는 자극적인 뉴스들이 저마다 나를 '눌러' 달라며 부지런히 들고 난다. 그러나 전쟁같은 하루의 뉴스 세례를 마감하고 그날 가장 많은 클릭수를 받은 기사가 무엇인지 집계해보면 결국 톱 순위를 차지하는 것은 어김없이 '한인' 관련 뉴스다. 한인 뇌물, 한인 추방, 한인 마켓, 한인 기업, 한인 미담…. 유수의 미국 신문 방송 미디어들에서는 아예 뉴스가 되지 않는, 주목조차 하지 않는 소식과 관심사지만 미주 한인들에게는 하루 1만번을 훌쩍 넘겨 클릭하며 궁금해하는 '중요하고 궁금한' 이슈이자 핫 뉴스가 되는 것이다.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뉴스 독자에게는 나와 내 가족, 내 친구와 이웃의 삶에 직접 관련이 있는 소식이 가장 중요하다. 초대형 강진으로 남미에서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비싼 위성의 현장 중계보다도 어젯밤 우리 집 정전이 돌풍으로 쓰러진 전신주 때문임을 알려주는 한 장의 사진에 더 눈길이 간다. 멀리 시카고에서 총격 테러로 수십명 사상한 긴급 속보보다 오늘 낮 LA한인타운 마켓의 소매치기 영상이 더 소름돋는 염려를 돋우는 것은 나와 비슷한, 나처럼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의 성취와 좌절이, 밤새 정전의 암흑 속에 어리둥절했던 그들의 황망함이, 어제 갔던 그 마켓 주차장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이웃의 충격이 모두 내 일상과 미래의 가능성에 강력한 연관을 가지기 때문인 것이다. 그 동질감이 개개인 뉴스 가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 속 한인들, 우리 이민자들, 이민자의 후손들이 서로의 사는 모습을 궁금해하고 관심을 보내며 성취엔 박수를, 좌절엔 안타까운 시선을 떼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눈높이를 이해하는 한인 미디어의 존재 이유를 웅변한다. 전 미주에서 보내오는 조용한 클릭의 데이터, 그 엄숙한 진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9-04-12

[감성 로그인] 유쾌한 프로 댓글러를 기다리며

나는 댓글을 자주 읽는다. 사실 매일 읽는다. 코리아데일리닷컴의 뉴스 댓글은 물론 다른 웹 페이지나 블로그 미디어들의 댓글, 페이스북 포스트나 인스타그램의 댓글도 즐겨 읽는다. 온라인 뉴스 편집자의 업무 영역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방문자들의 생각과 반응이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읽는다. '뉴스의 완성은 댓글' 이랄만큼 정보를 보완해주는 댓글도 있고 뉴스 보도에 대한 예리한 비판도 있다. 요즘엔 영상도 있고 그림도 사진도 이모티콘으로 장식된 3D급 댓글도 많다. 뉴스나 포스트가 '주인공' 이라면 댓글은 한걸음 물러나 '웅성대듯' 주고받는 조연급 뒷담화다. 웹에 공개되는 것이니 사실은 뒷담화의 옷을 입은 앞담화다. 동굴 담벼락에라도 뭐든 끄적이고 싶었던 인류의 조상들부터 뭔가를 말하고 타인과 나누고자 해온 인간 본능의 최신 수단이다. 대학 카페테리아에서 오가는 대화를 분석해봤더니 철학적 학문적 담론은 없고 죄다 친구들의 가십들 뿐이었다면서, 인간 언어와 뇌의 진화는 '뒷담화'를 위해 촉발됐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도 있다. 더구나 카페테리아에 마주 앉은 제한된 몇몇과는 비교도 안되게 천문학적 숫자의 불특정 다수들을 향해 내 주장을 널리 널리 퍼뜨릴 수 있는 막강 영향력을 지닌 것이 댓글이다. 접근 문턱이 낮기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댓글 여론의 장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역시 '목소리 큰 사람' 이다. 되도록이면 자극적인 언어로, 들리지 않지만 명백히 큰 목청으로, 비판과 문제 제기를 반복할수록 관심을 끌어모은다. 좋아요든 싫어요든 늘어나는 반응 수치는 다시 호기심을 자극하며 영향력을 증폭시킨다. 주연은 온데간데 없고 뒷담화 조연이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다. 프로 댓글러의 등장이다. 그런데 최근 두가지 흥미로운 리포트를 봤다. 지난해 한국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인터넷 뉴스나 토론 게시판에 댓글을 다는 사용자층이 10, 20대는 줄어들고 50대 이상은 늘었다고 한다. 10대나 20대들이 소셜 미디어나 게임 등을 집중 소비하는 반면 50대 이상 중장년층 사용자들은 주로 뉴스 콘텐츠를 소비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의 조사에서는 20, 30대 젊은 세대들은 댓글을 읽은 경험이 가장 높고 작성하는 경험은 가장 낮았던 반면 60대 이상은 댓글을 작성한 경험이 가장 높고 읽은 경험은 가장 낮았다. 결국 뉴스의 주 소비층인 50,60대 중장년들이 열심히 작성한 댓글 의견을 20,30대 젊은 세대가 주로 소비한다는 얘기다. 댓글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령대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은 놀랍다. 흔히 접하는 묻지마 욕설과 무차별 비방이 철없는 나이의 치기만은 아니었던 거다. 중장년층의 댓글 여론이 댓글 문화의 품질을 좌우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럼 점에서 나는 유쾌한 댓글을 희망한다. 유머는 나이와 지역을 안가리는 백전백승 치트키다. 빙글빙글 씨익 웃으며 한 수 접어주는 유머러스한 댓글을 만날 때는 나도 모르게 모니터 속으로 손 내밀어 악수하고 맞장구 치고 싶어진다. 오늘도 엽전, 쓰레기, 가짜, 무식, 닭과 쥐와 죄인이 난무하는 시끌벅적 댓글 속에서 성숙한 프로 댓글러의 위트와 유머 넘치는 보석 댓글의 방문을 믿고 기대한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9-02-15

[감성 로그인] 디지털 새해 결심 다섯가지

연초 새해에는 작은 계획이라도 세워 실천해보자는 나름 기특한 생각을 했었다. 특히 명색이 디지털부 소속인데, 디지털과 관련한 새해 미션도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 자료를 찾다보니 테크 전문 미디어 씨넷의 제안이 눈에 들어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한 좋은 습관들을 제시하고 있어 만만해보였다. 접수했다. 첫 미션은 이메일 디톡스였다. 요즘 웹 서비스는 이메일 주소 입력이 필수라 서핑 하다보면 홍보 이메일이 순식간에 메일함을 점령한다. 특히 어떻게 노출됐는지 이름도 낯선 사이트들의 정크 메일이 넘치게 쌓인다. 매일 5개씩 메일링 구독 취소 작업을 권했다. 정크 메일을 열고 끝자락에 보일 듯 말 듯 놓인 구독취소 버튼을 찾아 3주 정도 매일 작업했더니 이후 정크 메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귀찮은 만큼 효과가 확실했다. 두 번째 미션은 온라인에서 멋진 사람이 되기였다. 자랑이 아니라 나는 온라인에서 악플을 달지 않는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트집이나 비방이나 욕설 댓글을 볼 때면 한마디쯤 따끔한 지적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래서 이 미션을 채택했다. 악플 달지 말고 악플에 대응도 말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칭찬과 위로와 격려의 말을 쓰자고 결심했는데 솔직히 안 쓰는 것은 성공했지만 적극적인 선플은 부족했다. 게으름과 무관심이 결심의 절반을 깎아먹었다. 세 번째, 휴대폰 내려놓기 미션은 절대적으로 실패했다. 내려놓기는커녕 손에 휴대폰이 없으면 불안할 지경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다. 종일 한 손은 휴대폰용으로 기꺼이 할애하고 책상에서 식탁에서 소파에 앉아서도 습관적으로 폰을 집어든다. 걸을 때나 엘리베이터 탈 때나 줄 설 때나 혼자 먹을 때 심지어 타인과 먹을 때도 폰 화면을 수시 확인했다. 휴대폰 사용량을 측정하고 밸런스 유지를 돕는 앱을 설치하라는 권고는 결과를 보기 위해 또다시 폰을 들여다보는 아이러니가 우습다고 무시했다. 참패다. 네 번째 미션은 지금 가진 휴대폰에 감사하기였다. 매년 경쟁적으로 고가의 신형 스마트폰이 출시되고 프로모션이 업그레이드를 유혹하고 누구나 최신폰을 자랑삼아 말하는 환경에서 통신사 2년 할부 약정을 간신히 채우면 어느덧 구형폰 사용자가 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 11월로 2년 약정을 무사히 마치고 마침내 이달부터는 할부금이 쑤욱 빠진 고지서를 열어보며 진심 행복했다. 휴대폰 뿐 아니라 내가 가진 '새 것이 아닌 것' 들의 묵묵한 존재감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난 것은 뜻밖의 덤이다. 다섯 번째는 운전 중 안전 장치 확보였는데 이 미션을 위해 거추장스럽다며 카 액세서리를 회피해온 습관을 버리고 연초에 콤팩트한 휴대폰 거치대를 장만해 대시보드에 설치했다. 운전 중에는 최대한 폰에 손대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폰에 장치된 운전 중 자동 응답 기능을 활성화해서 오롯이 운전에만 집중하는 단계까지는 실천 못했다. 한 해의 끝에서 연초 결심을 되돌아보니 겨우 절반의 성공에 머물렀다. 마무리를 한다는 것은 시작의 기회가 온다는 다른 말이라고 위안하며 새해 디지털 결심은, 나머지 절반의 미션을 기필코 이뤄내자는 결심으로 시작하려 한다. 한 해가 저문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8-12-30

[감성 로그인] 부러우면 지는 시대를 사는 법

페이스북에서나 만날 수 있는 한국의 옛 직장 동기는 올해도 수십 포기 김장 사진을 올렸다. 여전히 워킹맘으로 남편 자식 건사하며 바쁘게 살면서도 그는 한국 각처의 귀한 재료들로 갖가지 김치를 담그고 때때로 남편 친구들을 초대해 손님상을 차려낸다. 일한다는 핑계로 삼시세끼 챙기기도 버거워하는 나는 그 바지런이 명백히 부럽다. 언론사의 한 선배는 최근 두툼한 인문 교양서 출간 소식을 조심스레 페북에 알려왔다. 축하 댓글을 올리며 부러움이 솟는다. 한 페친은 별 준비도 없이 치른 공인중개사 시험에 덜컥 붙었다며 부끄럽다 적었는데 내겐 부러움이다. 여왕처럼 근사한 생일 이벤트의 주인공이 된 지인의 함박 웃음도 부럽고 지난 쌩스기빙데이 연휴 내내 올려지는 근사한 터키 상차림과 환상적인 여행길의 페친 사진들도 한없이 부러웠다. 정답인지 아닌지 몰라도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그렇다면 나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에서 매일 매순간 맥없이 지고 또 진다. 심지어는 카카오톡 단체방에 매일 멤버들의 기도 제목을 꼼꼼히 나누는 다락방 식구의 부지런과 선한 마음에도 하염없이 부러운 패배를 맛본다. 도무지 이렇게 밥 먹고 숨 쉬듯 초고속 광역대로 지고 또 지면서 기엄기엄 살아도 사는 게 되는 걸까 싶다. 소셜 미디어의 네트워킹 파워와 정비례하여 부러움의 시공간이 무한 확장되는, 진정 극렬한 부러움의 시대다. 가까운 친지들과의 비교 문제가 아니다. 무심하려 해도 인터넷을 통해 대륙을 횡단하고 태평양을 대서양을 헤엄쳐 실시간 전송되는 타인의 행복, 명성, 성취와 소유의 융단 폭격이 인고의 정신 수양을 요구한다. 사진과 영상으로 '캡처' 되어 골라 뽑혀진 빛나는 순간들은 나와의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잘 다듬어지고 엄선된 행복의 단면이라고 아무리 되뇌어도 어리석은 부러움의 감정은 제어 불가다. 심리학자들은 부러움을 '불공평한 관계의 산물' 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에 맛보는 고통스러운 감정인 셈이다.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한 것을 누군가는 갖고 있다는 불공평, 심지어 내가 갖지 못했음을 타인의 소유를 통해 비로소 깨달을 때의 고통은 힘겹다. 그렇다면 부러움은 진정 패배자의 자책이기만 한 것인가. 전문가들은 타인의 성공을 부러워하지만 그 부러움의 대상을 얻으려는 노력을 자극시켜 궁극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개선시키는 '선한 부러움'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친구가 화려하고 풍성한 김장 김치로 가족들에게 행복을 선물했을 그 저녁, 짠한 심정으로 내 가족들을 바라보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상에서 제일 쉬운 오이지 한 통, 돌멩이 올려두고 앉으며 생각했다. 김장 김치급 부러움이 옹색한 오이지 한 통으로 게으른 주부의 '지위를 개선' 시켰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매순간 찾아오는 부러움의 고통이 느슨한 일상을 조금은 가치있게 바꿔줄 이유로, 의지로 이어지면 간혹 '찬란한 고통'으로 업데이트 될 수도 있겠다 싶다. 부러움의 시대를 살아내는 방법 하나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8-12-01

[감성 로그인] 종이신문 독자와 온라인 독자

종이 신문을 싹 없애고 온라인으로만 뉴스를 내보내면 어떻게 될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실 이건 좀 오래 묵은 의문이다. 종이신문의 사양화 우려가 본격 불거지던 십수년 전부터 미디어사는 물론 독자들도 심심찮게 주고받아온 궁금증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여전히 정답을 찾아 안개 속을 더듬는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책 없는 세상이 올까? 아무래도 올 것 같은데 진짜 오는 건 안될 성싶은 복잡한 심정과 비슷하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향해 체념 반 다짐 반으로 숨 토하듯 뱉어내는 자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글은 죽지 않지만 종이책은 사라지고 뉴스는 죽지 않지만 종이신문은 사라질 그 날이 천둥처럼 다가오고 있다. 최근에는 디지털 혁신과 온라인 유료화를 가장 빠르게 선도하는 뉴욕타임스의 최고 경영자가 '10년 후 미국에서는 종이신문을 아예 볼 수 없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새 신문이 트럭째 실려가 곧장 계란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뉴스도 들린다. 그러니, 그렇게 미래가 암울하니 종이신문을 없애고 온라인 뉴스만 내보내면 어떨까? 최근 한 미디어 연구소가 이 질문에 대한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30년간 종이 신문을 발행하다가 2016년부터 온라인 뉴스만 제공하는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의 사례를 분석한 것이다. 특히 미디어 기업으로서의 손익 변화 보다는 독자에 대한 뉴스 미디어의 영향력을 들여다봤다. 지면 발행을 중단하고 온라인 뉴스만 발행한 이후, 인디펜던트의 전체 독자 수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인디펜던트 온라인의 월 사용자 5천8백만에 비해 종이신문 구독자는 4만으로 온라인 사용자의 0.07 %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종이신문 중단으로 4만의 구독자가 빠졌지만 디지털 독자가 그만큼 늘어나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독자들이 인디펜던트의 뉴스 콘텐트를 소비하는 데 들이는 시간의 변화다. 신문 구독자 절반이 매일 신문을 읽는데 평균 30-50분씩을 소비한 데 반해 온라인 사용자는 인디펜던트 뉴스 열독에 한달 평균 6분을 소비할 뿐이었다. 특히 인디펜던트 뉴스를 소비하는 전체 시간 중 81%가 겨우 4만의 종이신문 구독자들에 의해 채워졌다는 결과가 놀랍다. 하나의 미디어가 생산하는 뉴스를 독자들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여 소비하느냐는 미디어의 영향력에 중요한 잣대기 때문이다. 온라인에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뉴스 경쟁자들이 사용자의 부지런한 클릭을 이끌고 기다리며 제한된 시간을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디어는 뉴스 영향력을 확산하고 유지하기 위해 종이 신문을 계속 발행해야 할까? 이 연구 결과가 주는 진짜 의미는 사실 종이냐 모니터냐의 선택이 아니다. 종이신문 독자들이 '기꺼이' 구독료를 지불하고 매일 시간을 들여 정독해왔던 이유를 명확히 깨닫고 붙잡아야 한다는 그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콘텐트' 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8-10-29

[감성 로그인] 세상이 뉴스에 비친 것만큼 나쁠까

뉴스 회사에 몸담고 있지만 이따금씩 세상 돌아가는 뉴스에서 벗어나 있고 싶을 때가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나라 이곳 저곳 총격에, 자살에, 엽기사고에, 불평등과 차별의 부당 사례가 널리고 쌓여 넘치게 등장한다. 놀라고 화내고 안타까움에 분개하는 것도 한두번이라 요즘엔 어지간한 사건에는 무표정 덤덤한 나 자신에 오히려 놀란다. 흉측하고 갑갑한 세상사 눈 돌리지 못하고 왜 지레 속 끓이나 하면서도 세상이 왜 이리 어지럽게 망가져가나 안타까운 심정이 자꾸 든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사실 세상은 원래 제 방식대로 잘 굴러가고 있는 건데, 기원전 1700년부터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고 한탄하면서 버릇없는 '요즘 젊은이들' 을 낳고 낳으며 2018년까지 이어져오는 건데, 범죄와 악행으로 폭망할 것 같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먹고 일하고 즐기고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데, 뉴스로 보이는 세상은 왜 점점 더 험악해지기만 할까. 어울려 사는 사회적인 동물, 인간의 삶에서 뉴스는 필수 요소다. 호기심의 욕구, 알고 싶고 알리고 싶은 정보 욕구가 만들어낸 필연의 산물이다. 뉴스의 태생적인 속성은 '놀라움' 이다. 독자를 놀라게 만드는 것이 뉴스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 는 뉴스의 오래된 명제가 말하듯 일상적이지 않은 것, 상식에서 벗어난 것, 사건이 되고 사고가 될 때 비로소 뉴스일 수 있다. 독자들은 뉴스를 보고 들으며 놀라야 한다. 그 놀라움이 뉴스에 가치를 부여한다. 당연히 뉴스 속 세상은 내 울타리, 경계 안의 작은 세상과는 레벨이 다르다. 상식과 보통, 중간과 무난함으로 평온하게 유지되는 일상과는 놀랍고 감탄스럽게 다른 것이 '뉴스가 된 세상' 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놀라움의 반복으로 무뎌진 감각에는 더 크고 깊은 자극만이 놀라움을 부른다. 뉴스 속에 비춰지는 세상이 갈수록 험악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처럼 슬픈 필연이다. 때문에 우리는 뉴스를 통해 세상을 보고 흐름을 판단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을 의무가 있다. 뉴스 속 세상을 실상의 크기로 확대시켜 오해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내 가치 판단의 자료로, 정보로 현명하게 취하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릴 권리가 있다. 미주중앙일보 웹사이트(koreadaily.com)의 모든 뉴스 페이지 하단에는 독자 댓글란이 있다. 우리가 제공한 뉴스가 독자에게 얼마나 큰 놀라움을 주었는지 그래서 결국 얼마나 더 뉴스다웠는지를 증명해주려는 듯 분노와 불쾌 가득한 거친 댓글들이 자주 오른다. 실제 대면하고 있다면 한창 주먹이 오갈 법한 욕설도 잦고 비방과 비난, 비하와 자조 섞인 푸념들이 넘친다. 뉴스를 통해 만난 세상에 대한 발길질일 수 있고 뉴스로 인해 일어난 자기 분노의 해소책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땐 한번씩, 화가 치미는 마우스와 키보드 앞에서 '뉴스 속 세상은 원래 놀라운 세상' 이라는 진실을 떠올리고 큰 숨 한번 내쉬며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댓글 세상 역시 좁은 창문 속 한켠의 확대된 세상일 뿐이라고 되뇌이며 그저 슬쩍 한번, 가져보는 희망이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8-09-13

[감성 로그인] 세상 변화시키는 인터넷 5가지 방법

인생 중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시간’을 절대적으로 점유한 일터에서의 시간 대부분을 컴퓨터 와 보낸다. 사이버 세상을 유영하다 온라인 네트워크에 기꺼이 사로잡히는 테크놀로지 친화의 삶이다. 컴퓨터 앞에 붙어 앉은, 종일 휴대폰 속 세상으로 달려가는 라이프 스타일은 하지만 이젠 특정 직업군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금은 누구나 온오프를 넘나드는 삶에 편입돼 있다. 기왕이면 키보드 워리어나 디지털 좀비로 엎드리기 보다는, 인간다움을 느끼고 행복감을 높이고 세상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온라인일 수는 없을까 싶던 차에, 테크놀로지와 행복의 관계를 연구하는 심리학자 치키 데이비스 박사가 최근 소개한 '인터넷을 사용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방법' 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온라인 시민 누구나 인터넷을 활용해 바람직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행복감을 높일 수 있는 쉬운 방법이었다. 우선 목표 지향 온라인 그룹에 가입할 것을 권했다. 페이스 북에는 수많은 온라인 그룹들이 있다. 애완동물, 요리, 여행, 스포츠 같은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는 그룹들이 있는 한편 공통의 목표에 중점을 두는 그룹도 많다. 정치 후보자를 선출하거나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거나, 환경 운동 같은 목적을 지닌 그룹에 가입하는 것은 큰 비용이나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사회적 연대감을 누리고 목표 성취에 따른 행복감을 높일 수 있다. 좋은 목적을 위한 모금 활동도 좋다. 소셜미디어는 십시일반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고 펀드 미' 같은 모금 사이트와 페이스북, 트위터 네트워킹의 활용은 이미 보편화됐다. 안타까운 사연의 친구를 위해 자선 기부를 요청하거나, 속한 단체를 위해 티셔츠를 팔 수도 있다. 선한 일을 위해 행동을 개시하는 자체가 성취감과 행복감을 높여준다. 사회적으로 공헌하는 타인에게 친절한 코멘트를 남기라는 조언도 신선하다. 악의적인 비난을 삼가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1분만 시간을 내서 응원의 댓글이나 긍정의 피드백을 남기기로 결심해보자. 댓글 쓰기를 긍정의 에너지를 발사하는, 나의 행복감을 높이는 기회로 만드는 것이다. 진정성과 관심이 담긴 친절한 코멘트를 남기는 것은 인터넷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나만의 웹사이트를 개설할 것도 권했는데, 개인 홈페이지가 부담스럽다면 블로그는 어떨까? 블로그를 만드는 무료 서비스는 넘친다. 타인에게 도움이 될 기술이나 지식을 블로그에 기록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작이 된다. 기술과 지식이라는 개념도 대단할 것이 없다. 내가 겪은 경험의 기록은 웹에서 귀중한 정보로 파급력을 지니며 그 영향력의 범주는 상상 이상이다. 자원봉사 온라인 분야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제안이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자원 봉사하는 것은 인생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시간과 노력에 대한 부담 때문에 막상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온라인은 좋은 기회를 준다. 책임 부담은 덜면서도 사회에 진정성 있는 역할을 담당하는 일원으로 살 수 있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8-08-09

[감성 로그인]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정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밀려 고전하던 '트위터'의 연속 흑자는 트럼프 대통령 덕분이라고들 말한다. 5300만 팔로어를 둔 '소셜 셀러브리티' 트럼프 대통령은 매일 평균 7.2개의 트윗으로 신개념 '트위터 정치'를 펼치며 세계의 이목을 트위터로 불러모으고 있다. 트럼프의 트위터 활동을 분석하는 웹사이트 '트럼프 트위터 아카이브'에 따르면 그는 2009년부터 현재까지 3만4110개, 대통령 재임 522일간 3775개의 트윗을 올린 열혈 트위터리안이다. 그의 트윗은 대통령 개인사에서 국내외 주요 현안과 이슈들까지 장르 불문으로 미국의 정책 방향은 트럼프의 트위터로 가늠한다는 것이 당연시 될 정도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트윗에서 가장 많이 다룬 주제는 주요 미디어의 비판과 외면을 트위터로 극복해 온 인물답게 '가짜뉴스'가 245회로 최고다. 폭스뉴스, 혹은 션 해니티(폭스뉴스 간판 진행자)가 227회, 러시아 관련 트윗이 185개로 나타났다. 지난 9년간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여론조사(poll)가 586회, 돈(money)이 421회, 등급(rating)이 343회로 수위를 차지했는데 다음 순위로 리스트업 된 단어들에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실패자(loser)가 234회, 멍청이(dumb, dummy)가 222회, 끔찍한(terrible)이 204회, 어리석은(stupid) 나약한(weak) 바보같은(dopey) 말들이 순위에 올랐고 부정직한, 시시한, 무능한, 따분한 등의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비난 어휘들이 트럼프의 트윗을 채운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온라인에서 사람들은 과격하고 공격적인 용어를 자주 쓴다. 실명을 드러내는 소셜 미디어에서조차 자극적인 목소리가 많이 오른다. 입대신 손가락으로 말하는 온라인 환경에서는 자신이 혼잣말을 하고 있는 양 착각하기 쉽다. 모르는 새 자기 통제에 느슨해진다. 그러나 이것이 예상못한 파급력으로 늘 문제를 일으킨다. 실세 권력자나 유력 정치인으로 온라인 파워까지 지닌 경우라면 그 파장은 상상초월이다. 백악관 대변인인 새라 허커비 샌더스가 버지니아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서비스를 거절당했다고 트윗을 올리자 온라인은 찬반 양론으로 들끓었다. 이 와중에 대통령이 앞장서서 자신의 트위터에 "레드헨 레스토랑은 샌더스처럼 훌륭한 사람을 거절하는 것보다 외관 청결에나 집중해라. 외관이 더러운 식당은 내부도 더럽다는 게 내 지론"이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이미 공화당 지지자들의 거센 비난 세례에 직면한 일개 식당을 향해 막강 권력자인 대통령이 근거없이 '더러운 레스토랑'이라는 공식 낙인을 찍은 것이다. 칭찬이나 긍정의 말을 찾기 힘든 트럼프의 그간 트윗 모드로 보면 별난 행보도 아니긴 하다. 단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대변인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서슴없이 특정 식당을 지목 비난한 그가 레드헨 식당 주인과 샌더스 대변인과, 이 땅의 지지자 비판자 모두를 아우르는 전 미국민 앞에 자유와 복리 증진에 힘쓸 것을 엄숙히 선서한 대통령이라는 그 사실이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8-06-26

[감성 로그인] 홈리스 고통 분담 '한인 만큼만'

한인타운 한복판에 홈리스 셸터가 들어선다는 '통보' 를 접하는 순간 울컥 불쾌했다. 반사적으로 92년 LA폭동이 떠올랐다. 홈리스 셸터 신설이 왜 한인타운 인근 주민들과 의논도 없이 결정됐나. 65개 침상 규모의 임시 트레일러가 홈리스 문제의 해법일 수도 없지만, 당장의 유일한 미봉책이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왜 그 장소라야 하는지, 지역민들을 신중히 고려했는지,예상되는 문제점은, 보완책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일방적인 결정 통보에 한인 커뮤니티가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정당하다. 그 불쾌감이 '한인타운이 무시당했던' 가장 아픈 기억을 소환한 것이다. 특정 커뮤니티의 해묵은 분노를, 엉뚱한 화살의 후폭풍을 고스란히 맞았고 덧붙여 공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한인타운을 상처 투성이 맨몸으로 지켜냈던 이민 선배들의 아픈 역사가, 직접 겪지 않은 내게도 이처럼 각인된 트라우마로 숨어있을 줄은 몰랐다. 무시당했다-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는 절대 건드리면 안될 상처다. 그런데 이 같은 저항감을 '님비(Not In My Backyard)'로, 한인들의 이기주의로 몰고가는 움직임이 있다니 더욱 억울하다. 십여개의 홈리스 셸터를 중심으로 세계 최대의 홈리스타운이 되어버린 LA다운타운 스키드로는 홈리스들만 사는 곳이 아니다. 스키드로의 중심은 '토이 디스트릭트'로 불리는 비즈니스 지구다. 빼곡하게 늘어선 낡고 허름한 건물 안에 수많은 홀세일 스토어들이 각자의 치열한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 비즈니스의 주인 다수는 한인들이다. 그들은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생업의 현장에서 홈리스들과 생활한다. 손님을 맞이할 상가 앞 도로는 약에 취해 쓰러진 홈리스들이 선점했다. 악취와 쓰레기는 일상 풍경이다. 불쑥 들어서 가게 안을 배회하고 상가 안 골목을 서성이고, 때로 음식을 때로 돈을 요구하다가 난데없이 고함을 지르고 약에 취해 옷을 벗어 던지며 욕설을 퍼붓고 가게를 막고 쓰러져 눕거나 사이렌 요란히 구급차에 실려나가는, 난감한 매일의 해프닝에 익숙해지려 무감해지려 애쓰며 그들은 묵묵히 살아간다. 만약 '홈리스 고통 분담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다운타운의 한인들만으로도 LA한인의 할당 책임을 오래 전부터 충분히 채워왔고 현재진행으로 감당하고 있다 말할 것이다. 홈리스가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면 스키드로 한복판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이들 역시 그 시스템 부재가 배설한 힘겨움을 감내하고 산다. 그 모진 다운타운의 기억이 '울컥'의 또 다른 이유였을까. 그 힘겨움을 한인타운에서 또 반복하라는 것인가 싶은거다. 홈리스 셸터는 홈리스를 거리에서 시설 안으로 거두는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노숙자 거리 확산의 중심점이자 심장부가 되어 왔다. 스키드로의 지난 십여년 역사가 웅변한다. 때문에 더 치밀하게 계획되고 장기적으로 전망되어야 하며 매일 접하고 부딪치게 될 지역민들에 대한 존중, 그들의 공감과 합의를 무엇보다 우선했어야 한다. 타운에서 비즈니스를 꾸리는 한인들과 거주자들은 물론, 한인타운을 마음의 고향으로 의지하고 드나드는 수많은 한인들에게 그 저항감은 뒷마당 사생활 침해에 대한 불평이 아니라 앞마당의 생업을 위한 절박함이며 고단한 이민자들이 건강하게 키우려 애써온 또다른 고향에 대한 보호 본능에 가깝다. 홈리스 정책 실패의 여파가 다운타운에서 웨스트쪽으로 더 진행되기 전에 또, 한인타운을 바리케이드 삼으려는 것이냐는 떨쳐지지 않는 의심이 나의 과장된 기우이길, 피해의식이길 간절히 바란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8-05-20

[감성 로그인] 페이스북 지우고 어디로 가지?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캠프와 연계됐던 영국의 데이터 회사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가 8700만명의 페이스북 이용자 정보를 유출했다는 폭로의 후폭풍이 여전히 거세다. 전세계 인구의 1/4을 친구로 묶고 연결해주었다는 이 친근한 서비스의 뜻밖의 배신에 사람들은 계정 삭제로 대응하고 있다. 왓츠앱 공동창업자인 브라이언 맥튼이 페이스북 삭제 해시태그 #deletefacebook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촉발된 페이스북 삭제 운동은 테슬라가 팔로어 260만명의 자사 홍보 페이지를 삭제하고 애플의 공동창업자 워즈니악이 탈퇴를 선언하는 등 실리콘밸리의 유명인과 다수 기업들의 탈퇴 동참으로 파장을 이어가고 있다. 12일에는 미국의 페이스북 이용자 10명 중 한 명꼴로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실리콘밸리의 컨설팅사인 '크리에이티브 스트래티지'가 미국인 1천명을 여론 조사한 결과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파문 이후 응답자의 9%가 개인정보 유출 염려로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17%는 스마트폰에서 페이스북 앱을 지웠고, 35%는 정보 유출 파문 이후 페이스북 이용이 줄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삭제한 이용자나 유지하는 사용자나 똑같이 묻는 질문이 있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지?" 진짜 친구든 적당히 친구든, 가족이든 친척이든 동료든 상사든, 무슨 이름 무슨 모양으로든 연결되고 묶인 사람들이 저마다 한 무더기씩 존재하고, 그들과 나누고 교감한 이야기가 시간의 레이어에 켜켜이 저장된 공간을 싹둑 잘라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질고 독한 맘을 먹고 불의에 단호히 응징하리라 해도 이번엔 페이스북으로 누려온 깨알같은 재미와 편리가 못내 미련이 된다. 남들은 무심히 잘만 쓰는데 나혼자 오버하나 싶다. 이번에 혼줄이 났으니 오히려 보안이 든든해지지 않겠느냐는 애틋한 기대감으로 염려를 달래기도 한다. 괘씸한 페이스북을 탈퇴하겠다면서 '그 대신' 앞으로는 인스타그램에서 만나자는 페친에게는 인스타그램도 페이스북이 인수한 서비스라고 쥐어박는 소리를 해야 하나 갈등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그토록 의존하는 것은 '연결'을 향한 본능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연결되고 싶고 관계를 맺고 싶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우리는 관계를 통해 내 위치와 존재를 확인하고 그 안에서 크고 작은 기쁨과 즐거움을, 또 그만큼의 좌절과 실망을 동시에 수확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더구나 인터넷과 테크놀로지로 구축된 소셜 생태계는 거대하고 촘촘한 전 지구적 관계망으로 나날이 견고해져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요물단지 페이스북, 없애려니 아깝고 가만있자니 찜찜하다면 일단 비밀번호부터 바꾸고 공개 설정 항목들을 점검하여 현명하고 깐깐한 사용자가 돼보자. 페이스북 헬프 센터 검색창에 'Cambridge Analytica'를 치면 내 개인정보가 유출됐는지 여부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이용자와 이에 연결된 친구로 데이터가 유출된 사용자는 8만 6000여명이라고 한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8-04-15

[감성 로그인] '미투' 희석시키는 '펜스룰'

나도 당했다 #미투, 당한 당신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위드유, 성폭력의 시대를 끝낼 시간이 됐다 #타임스업. 소셜 미디어는 요즘 매일 새로운 해시태그의 물결이다. 작년 10월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Me Too)' 캠페인은 불과 몇 개월 사이에 한국과 미국을 넘나드는 동시간의 사회 운동으로 발전했다. 법조계 문화계 교육계 종교계 정치계, 권력의 계층이 엄존하는 거의 전 분야에서 봇물 터지듯 권력형 성폭력의 실체가 드러나고 충격과 분노와 허탈과 좌절의 시간을 겪으며 차츰 공감과 연대로의 진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중에 최근 '펜스룰 (Pence Rule)' 이라는 맞개념이 등장했다. "아내 이외의 여자와는 절대로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 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과거 발언에서 시작된 이 경건해보이는 '룰' 은 미투 성폭력 고발의 대란 속에서 남성들이 내건 일종의 바리케이드다. 구설에 오를 수 있는 행동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아내 외의 다른 여성과 개인적인 접촉을 않는 것이 펜스룰의 개념이다. 이로 인해 여성 직원을 회식 자리에서 제외시키고 출장 업무에서 배제하고 심지어 업무 지시조차 '말을 섞으면 오해를 살 수 있어' 오직 문자로만 내리는 상사가 등장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는 펜스룰을 따른다는 남성들의 글이 미투처럼 이어진다. "여직원과 함께 식사하기가 무섭다", "무조건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가해자가 되어 있을 수 있다" "일종의 방어운전 같은 개념이다" 애초에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에 남성들은 항변한다. 내가 성범죄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펜스룰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무고한 상황에서도 여성의 증언만으로 가해자라는 누명을 쓸 수 있고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없기에 스스로를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라고. 오랜 고민과 망설임 끝에 미투 운동에 얼굴을 드러낸 여성들의 고통을 '무고한 고발' 의 가능성으로 폄하할 수 있는 발상이고 여성을 동료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왜곡된 시선의 반증이기에 안타깝고 씁쓸하다. 110년 전 미국 의류업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 환경을 견디다 못해 광장에 나와 노동권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쳤다. 여성의 생존권과 존엄성을 요구했던 그 목소리는 100년하고도 10년이 지난 오늘 새삼스럽다. 권력과 성폭력으로 빼앗긴 장미의 존엄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빵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긴 시간 고통을 감내하거나 내놓고 나서지 못했던 공포와 두려움이 2018년의 진실이다. 펜스룰로 차단막을 치는 남성들을 보며 마음놓고 일할 기회, 가진 능력을 발휘할 기회, 동료로서 어울려 협업할 기회, 더불어 살아갈 기회를 제한받고 강자생존의 현장에서 여성들이 또다른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내일은 아니기만을 간절히 희망한다. 3월 8일은 국제여성의 날이다.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email protected]

201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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